24년 전 영동세브란스병원 수술실. 23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환자의 척추 상태는 심각했다. 디스크 수술이 꼭 필요한 환자였다. 수술 준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술실의 공기는 달랐다. 긴장감이 맴돌았다. 집도의인 김영수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진행하는 수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튀어나온 디스크를 잘라내는 것이 기존 방법이라면, 김 교수는 특정 물질을 주입해 디스크를 녹이는 수술법을 택했다. 칼 대신 바늘로 디스크를 수술하는, 그 첫 시험대였던 셈이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병원 전체가 그 젊은 여자 환자의 수술 결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어요. 바로 2년 전에 영동세브란스가 개원을 했으니까 내 수술이 만약 실패하면, 김영수는 물론 영동세브란스도 정말 '큰일'이 나는 상황이었죠."
김영수 원장은 이후 '생애 최고의 날'이 될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병원 전 직원의 마음을 초조하게 했던 것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의료진도 그랬지만 다른 척추 디스크 환자들이 더 놀랐어요. '나는 아직 걷지 못하는데, 저 처녀는 수술이 끝나자마자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죠. 그렇게 예후가 좋으니까 모두들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국내 척추 수술의 명의라 하면, 단연 1순위로 꼽히는 김 원장. 영동세브란스 교수로 재직했던 25여 년 동안 매년 1000건이 넘는 수술을 해왔고, 척추디스크 수술전문 병원을 개원한 현재도 하루 평균 6건의 수술을 하고 있는 그다. '눈 감고도 할 정도'로 수술을 해왔지만 그는 1984년 5월 3일, 그날의 수술과 '생애 최고의 환자'를 또렷하게 기억했다.
"수술이 잘 안 됐으면 얼마나 의기소침해졌겠어요. 그때부터 자신감과 희망을 갖게 된 거죠. 또 (수술 방법이) 점점 알려지면서 척추 디스크 환자들이 전국에서 몰려왔어요."
국내뿐 아니었다. 해외에서도 김 원장은 '척추 수술의 대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노화로 인한 퇴행성 디스크 수술에도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이 역시 척추 수술의 새로운 역사였다. 김 원장은 1994년 미국과 프랑스, 독일 등으로 '수술 지도 투어'를 했는데, 외국에서 외국 환자를 직접 수술하며 가르친 한국 의사는 당시 김 원장이 최초였다.
현재 국내 척추 디스크 수술의 권위자로 꼽히는 전문의 중 절반 이상이 김 원장의 제자다. 지금의 '김영수'를 있게 한 '23세 아가씨'. "내가 그 환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해요. 당연히 36년 의사생활 동안 최고 환자였죠."
[MK헬스 = 이근주 기자]